프레임을 덧씌우는 가상 앞에서,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기 (2025)

콘노유키

김선열의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가상의 군수 기업 ‘CTS(CatastroTech Solutions)’의 팝업 스토어를 컨셉으로 한 개인전이다. 전시장에는 CTS의 기술로 제작된 가상의 신제품이 소개된다. 영문 약칭 세 글자로 소개되는 상품은 구매자의 감정이나 오감에 호소하는 도구들인데, 재난적 상황에 대응하여 ‘적응’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감시하는 드론을 통해서 표정을 분석하여 감정을 분류하는 <ESD(Emotion Sentinel Drone) - 감정 감시 드론>[1], 고통스러운 재난 환경에서 미소를 띠게 교정하는 <SMF(Smile Manufacturing Frame) - 스마일 제조 프레임>, 기부하면 재난 규모에 따른 주식투자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QR코드가 있는 코인 <SCC(Safe Coin Conversion) - 세이프 코인 환전>, 그리고 노이즈나 시각적 충격에 대비하는 고글 <VSI(Visual Shock Interfraction) - 시각충격 집중>이 소개된다. 하지만 관람객이 경험할 수 있는 신제품은 신박하고 세련된 기술로 구현된 도구보다는 장난감과 같은 인상을 준다. 예컨대, <SMF>는 얼굴을 직접 교정하여 웃음을 만드는 도구로 소개된다. 홍보 영상은 다양한 재난 현장에서 불안을 감소할 수 있음을 증명하지만, 웃어 넘어가기에는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임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김선열이 구상한 가상의 팝업 스토어에 소개된, 단순하고 언뜻 보기에 진지해 보이지 않은 신기술은, 인류 모두가 소소할지라도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표정 짓기나 시지각적 적응, 그리고 기부 형태처럼, CTS 제품은 순응을 자연스럽게 강요하는 수단이 된다. 사람에게 폭력을 직접 휘두르는 도구가 아니지만, 개인의 정동들을 교정하고 감정을 소비재로 환산한다는 점에서, 김선열은 인간의 시선을 두려움에서 회피하도록 하는 ‘뼈대’로 기능하는 지점을 제시해 준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중요한 것은, CTS가 재난을 복원하는 힘이 시지각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재난 이후의 도시 재건을 조각이나 입체 작업으로 실현하는 대신, 이미지를 만드는 구조 자체에 주목한다. 예컨대, <VSI>는 충격을 전달함으로써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충격에 미리 적응하도록 한다. 또한 웃음을 교정하는 <SMF>는 표정을 하나의 스크린으로 만들어버린다. 말하자면, <SMF>는 얼굴을 심신의 안정이 투사되는 곳이며, 인상(印象이자 人相)의 틀을 잡는 골자로 기능한다. 강요되는 웃음은 3D 프린팅으로 만든 도구(작품)처럼 양산되고 복제되고 무한 생산된다.

재난을 복원하는 기술은 재난의 비참함에서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는 점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기술에 의한 인간의 컨트롤은 군수 사업이나 이를 추진하는 민간단체, 심지어 국가 기관에서만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CTS 못지않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감정을 쉽게 드러내고 조정하는 환경에 살고 있다. <ESD>에서 데이터로 분석된 표정은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한 희로애락의 반응—우는 이모티콘, 좋아요!, 하트 보내기[2] 등—이나, 라이브 방송에서 얼굴과 감정을 노출하여 코인을 받거나 틱톡에 본인의 내적인 고백을 올리는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기술적 발전에 따른 컨트롤은 통제와 조정을 거듭하면서 군수 사업뿐만 아닌 일반인의 삶에 침투되어 있다[3]. 이러한 삶에서 우리의 감정은 개인보다 큰 규모의 기업이나 조직에 소비될 뿐만 아니라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 안에서 적극적으로 개인이 소비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의해 초토화된 곳에서 타인의 아픔을 상상해 보기란 쉽지 않지만[4], CTS는 이를 극복해 버렸다. 말하자면, 이 가상의 군수 사업은 ‘아픔을 상상하는’ 힘을 시지각적으로 과시한다.

CTS가 제시하는 기술은 현실적이지 않음에도 호소력을 가질 때, 이는 현실에서 간접적 또는 직접 경험하는 재난이 이 정도로 쉽게 넘어갈 수 있다 =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기만으로 나타난다. 전쟁이나 대재난의 막대한 힘을 축소하기는 김선열이 전시 제목으로 가져온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의 소설의 무대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부는 가능하지만, 주식 투자처럼 통계 수치를 통해서(만) 재난 규모가 시각화되는 <SCC>처럼, 우리는 막대한 규모가 만든 대재난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앎은 간접적이고 일시적이며, 언제든 ‘채널 돌리듯이’[5]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전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가상이 아니며, 현실을 시지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적응하는— 즉 소비하는—측면에서 봤을 때 ‘현실의 팝업 스토어’라고 할 수 있다.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 ‘일시적’으로 기능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실질성에서 미끄러지면서, 시지각적인 간접 경험은 우리의 눈을 역설적으로 재난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장소를 가진 <SZS(Safe Zone Shelter) - 안전구역 셸터> 또한 시지각적으로 호소하는 특징이 있다. 재난용 쉘터라는 일시적인 쓰임을 생각한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빛을 난반사하는 은박담요는 전시공간에 견고한 장소를 만드는 대신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도 다른 작업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관람객의 신체적 경험이 동반되는 점이다. 생각보다 튼튼하고 따뜻하다는 사실은 관람객이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골자, 즉 프레임을 통해서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씌우는 대신, 이미지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시지각에 기반한 “기술-자본-재난 체계 안에 편입되어 있음을 몸으로 경험”[6]할 뿐만 아니라, 그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 전시에 포함된 작품의 제작년도는 모두 2025년이다.
[2] ‘좋아요’는 페이스북, ‘하트 보내기’는 인스타그램의 소통 수단의 하나다.
[3]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컨트롤의 편재에 따라 인간이 생활하는 환경, 즉 대지가 된다고 말한다. ポール・ヴィリリオ, 土屋進(譯), 『瞬間の君臨: 世界のスクリーン化と遠近法時空の解体』, 新評論, 2003, p. 201
[4] 귄터 안더스(Günter Anders)는 핵폭탄을 거론하면서 규모가 막대할수록 상상도 불가능하고 책임이 발생하기 힘든 점을 말한다. ギュンター・アンダース, 青木隆嘉(譯)『核の脅威: 原子力時代についての徹底的考察』, 法政大学出版局, 2016, p. 133-134
[5] 채널을 돌린다는 표현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2003)에서 가져왔다. 이 글이 쓰인 시기에 ‘채널’은 주로 TV 방송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겠지만, 오늘날 인터넷 사이트나 SNS 어플리케이션처럼 정보에 대한 관심을 여기저기 돌리며 켰다 껐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6] 김선열이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를 준비하면서 쓴 작가 노트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참을 수 없는 우레탄의 가벼움  (2023)

조숙현(전시기획자/미술평론가)

김선열 작가의 작업을 분석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흥미로움은 어떤 ‘틈’, 혹은 ‘갭’이다. 그 틈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다. 시각예술 작가가 보여주는 ‘비시각’적인 틈이 비평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기대를 하게 했다. 여기서는 이 지점에 대해 최대한 집중하며 비평을 쓰고자 한다. 

근작이며 대표작인 <쓰나미를 이기는 방법>(2023)은 재난 시대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재난 시대를 마주하는 작가의 이중적인 반응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장은 두 개로 구성되는데, 공간으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재난에 대한 인식과 경각-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태도를 꼬집는 개념적인 방식으로 나뉜다고 보아야 한다. 첫 번째 방에서는 방파제를 구성하는 테트라포드와 사이렌이 설치되어 있다. 사이렌에서는 실제로 경고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이렇게 두 가지의 전형적인 재난의 장치들이 전시되며, 작가는 우리의 현실-“우리는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라는 전언을 선언한다. 테트라포드는 우레탄폼을 사용하여 작가가 만든 작품인데, 실재보다 현저히 가벼운 질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재난이라는 상황과 대비되는 이런 ‘가벼움’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설치 작품 <Safe zone>에서는 작가의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공간에서는 ‘에어 튜브’가 중요한 기표로 작용한다. 에어 튜브는 비닐에 공기를 채워 만든 일종의 투명 창인데, 관객은 에어 튜브로 장착된 밀폐된 작은 공간 안에서 외부의 재난을 관람할 수 있다. 에어 튜브는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하나의 막에 불과하다. 즉, 보호막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재난이 닥친다면 보호의 기능을 할 수 없고,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너무나 허약하고 우스울 정도로 허술한 ‘뽁뽁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관람객은 에어 튜브 안에서 재난을 감상한다. 마치 자신은 그런 재난에서 영원히 보호될 것처럼 말이다. 김선열 작가는 바로 이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재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순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준다.  

언젠가 외국 친구가 한국을 방문해서 나에게 서울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나는 내심, 이방인인 그에게 비추어졌을 나의 고향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는 무엇을 가장 인상적으로 포착하였을까? 서울의 오래된 역사와 고궁? 모던한 빌딩 숲?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사진이 비집고 들어온 틈은, 놀랍게도 ‘깜찍함’이었다. 서울의 유명한 랜드마크에 설치된 조형물은 고건축이나 유명한 작가의 조형 작업이 아니라, 펭수나 뽀로로, 루피,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들의 조형물이었다. 그것은 서울역에, 강남역에, 가로수길에, 홍대에 위치해 있었고, 한결 같이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표정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귀여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을 글로벌 도시로 키우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않고, 그에 따른 거창하고 세부적인 전략과 프로파간다를 내세우지만 정작 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뽀로로와 펭수인 것이다. 

김선열 작가의 작품 <안전 장비> 중 ‘우주소년 헬멧’을 보고 문득 그 일화가 떠오른 이유는, 자본주의의 끄트머리에서 ‘소비 만능주의’로 향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도 정의될 수 있는 ‘소비 만능주의’에서 우리는 종종 난감하고 기이한 상품을 맞닥뜨린다. 그것이 기이한 이유는 물건의 기능과 목적, 그리고 생김새의 불일치에서 기인하는데, 물론 그 연유는 모든 것이 소비를 부추기는 요소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가령 펭수와 뽀로로, 네이버 프렌즈의 귀여움은 미소 뒤에 많은 것을 잊게 한다. 아니 실상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지갑을 열게 만든다. 그러나 그 맹목적인 팬덤은 사실 광신에 가까워, 새삼 현대인의 얄팍한 소비 철학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귀여우면 상관 없어요, 그것이 무엇이든, 난 그냥 소유할래요.’ 라는 식의 소비 철학은 이 도시의 이방인이 나에게 보여준 수많은 사진 속에서 반증된다. 그제서야 그 귀여움은 예사롭지 않은 어떤 공허함으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김선열 작가의 우주소년 헬멧은 아톰과 미키마우스 등 누구보다 친숙한 캐릭터를 차용하여 만든 보호 장치이다. 그러나 안전 장비라는 미명 아래 반짝이는 그것들은 소비욕구를 자극할 만큼 예쁘지만 동시에 보호는커녕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마 진정한 재난 상황에서 그 헬멧을 쓰고 나간다면 좀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덕 조던 하이’라는 작품은 “이 신발을 신으면 물위에서 엄청난 속력을 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땅위에서는 엄청난 점프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라는 천연덕스러운 문구로 우리를 꼬신다. 그러나 나이키 조던 시리즈 운동화에 도날드 덕의 물갈퀴 형상을 한 이 기이한 작업(제품)은 실상, 쓸모 없는 소비 지향주의의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외에도, 김선열 작가가 포착한 ‘틈’은 현대 사회 구석구석에 미친다. 이를테면 <너와 나의 사이> 같은 작업을 보자. 알록달록한 바위들이 놓여져 있다. (이 역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레탄 재질이다.) 그리고 그것을 투영하는 미디어 속 바위가 있다. 실재와 허구 중, 사람들은 무엇을 더 선호할까? 만약 이것이 아트라면, 놀랍게도 허구에 좀 더 가치가 실리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이 작품은 실상 불과 몇 년전까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NFT 열풍과 아트에 대해 다루면서, 그것을 실제 아트의 몸뚱이와 디지털 내부의 이미지로 분리시켜 NFT 아트에 대해 모두가 궁금해하지만 침묵하는,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아트가 될 수 있는가?’, ‘왜 그것은 실제 아트를 능가하는가?(특히 가격적인 측면에서)’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컬러풀한 바위는 이토록 가벼운가? 그리고 어떻게 이미지가 실재를 능가하는가? 이 너와 나의 ‘사이’는 젊은 작가가 미술계에 던지는 일종의 ‘허 찌르기’ 이다. 

<나는 아니어야 한다> 작업 역시 현대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인 환경에 대해 다루면서, 그것을 다루는 현대인들의 아이러니한 태도에 대해 지적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모두가 환경 파괴의 심각성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는 아니어도 되기 때문이다’. 책임과 역할에 대한 불특정 타인에 대한 떠맡김은 환경 파괴를 멈출 수 없게 하는데, 그럼에도 환경 파괴 이슈는 끊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비 지향주의적이고 이슈 메이킹이 필요한 이벤트에 여전히 소비 파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흔한 에코백과 텀블러는 역으로 지구를 파괴하고 있고, 환경을 보호하자는 슬로건 홍보를 위해 종이와 플라스틱이 낭비되고 있으며, 환경 친화적인 태도는 그 어떤 것보다 소비 지향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다. <나는 아니어야 한다> 설치 작품에 등장하는 플라스틱 병과 도축된 돼지, 그리고 해양 쓰레기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설치물은 모두 이런 모순을 김선열 작가만의 화법으로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김선열 작가의 화법’ 내지는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의 그 질감이다. 작가들에게 있어 특기라는 것은 크게 ‘개념’과 ‘스킬’로 나뉜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롭고 개성 있는 작가만의 관점이 돋보일 때 그것은 개념과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고, 직접 눈으로 봤을 때 드러나는 디테일의 섬세함이나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자아내는 어떤 숭고함은 ‘스킬’로 거칠게나마 분류될 수 있다. 김선열 작가의 경우 스킬 중에서도 독보적인 ‘질감’에 대해 꼭 이야기하고 싶다. 우레탄이나 클레이, 레진 등의 질료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질감 – 질척이면서 귀여운, 불편함을 자극하는 어떤 덩어리성 –은 작가가 가진 뛰어난 역량이다. <안전 장비>의 불편함은 자본주의 속성을 꼬집는 작가의 태도보다는 그것이 실제로 사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완성도에서 비롯된다. <나는 아니어야 한다>에서 나뒹굴고 있는 빈 병들은 웨하스 과자를 연상시키는 질감 때문에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Brave New World>에 등장하는 클레이 등장 인물의 덩어리성 질감은 너무나 그럴듯해서, 그것이 지적하고자 하는 소비주의의 섬뜩한 공허함에 잘 어우러진다. 김선열 작가의 독특한 질감이 좀 더 날카로운 개념 지향성을 가질 때의 결과물이 기대가 되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