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을 덧씌우는 가상 앞에서,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기 (2025)
콘노유키
김선열의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는
가상의 군수 기업 ‘CTS(CatastroTech Solutions)’의 팝업 스토어를 컨셉으로 한 개인전이다. 전시장에는 CTS의 기술로 제작된 가상의 신제품이 소개된다. 영문 약칭 세 글자로 소개되는 상품은 구매자의 감정이나 오감에 호소하는 도구들인데, 재난적 상황에 대응하여 ‘적응’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감시하는 드론을 통해서 표정을 분석하여 감정을 분류하는 <ESD(Emotion Sentinel Drone) - 감정 감시 드론>[1], 고통스러운 재난 환경에서 미소를 띠게 교정하는 <SMF(Smile Manufacturing Frame) - 스마일 제조 프레임>, 기부하면 재난 규모에 따른 주식투자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QR코드가 있는 코인 <SCC(Safe Coin Conversion) - 세이프 코인 환전>, 그리고 노이즈나 시각적 충격에 대비하는 고글 <VSI(Visual Shock Interfraction) - 시각충격 집중>이 소개된다. 하지만 관람객이 경험할 수 있는 신제품은 신박하고 세련된 기술로 구현된 도구보다는 장난감과 같은 인상을 준다. 예컨대, <SMF>는 얼굴을 직접 교정하여 웃음을 만드는 도구로 소개된다. 홍보 영상은 다양한 재난 현장에서 불안을 감소할 수 있음을 증명하지만, 웃어 넘어가기에는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임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김선열이 구상한 가상의 팝업 스토어에 소개된, 단순하고 언뜻 보기에 진지해 보이지 않은 신기술은, 인류 모두가 소소할지라도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표정 짓기나 시지각적 적응, 그리고 기부 형태처럼, CTS 제품은 순응을 자연스럽게 강요하는 수단이 된다. 사람에게 폭력을 직접 휘두르는 도구가 아니지만, 개인의 정동들을 교정하고 감정을 소비재로 환산한다는 점에서, 김선열은 인간의 시선을 두려움에서 회피하도록 하는 ‘뼈대’로 기능하는 지점을 제시해 준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중요한 것은, CTS가 재난을 복원하는 힘이 시지각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재난 이후의 도시 재건을 조각이나 입체 작업으로 실현하는 대신, 이미지를 만드는 구조 자체에 주목한다. 예컨대, <VSI>는 충격을 전달함으로써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충격에 미리 적응하도록 한다. 또한 웃음을 교정하는 <SMF>는 표정을 하나의 스크린으로 만들어버린다. 말하자면, <SMF>는 얼굴을 심신의 안정이 투사되는 곳이며, 인상(印象이자 人相)의 틀을 잡는 골자로 기능한다. 강요되는 웃음은 3D 프린팅으로 만든 도구(작품)처럼 양산되고 복제되고 무한 생산된다.
재난을 복원하는 기술은 재난의 비참함에서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는 점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기술에 의한 인간의 컨트롤은 군수 사업이나 이를 추진하는 민간단체, 심지어 국가 기관에서만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CTS 못지않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감정을 쉽게 드러내고 조정하는 환경에 살고 있다. <ESD>에서 데이터로 분석된 표정은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한 희로애락의 반응—우는 이모티콘, 좋아요!, 하트 보내기[2] 등—이나, 라이브 방송에서 얼굴과 감정을 노출하여 코인을 받거나 틱톡에 본인의 내적인 고백을 올리는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기술적 발전에 따른 컨트롤은 통제와 조정을 거듭하면서 군수 사업뿐만 아닌 일반인의 삶에 침투되어 있다[3]. 이러한 삶에서 우리의 감정은 개인보다 큰 규모의 기업이나 조직에 소비될 뿐만 아니라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 안에서 적극적으로 개인이 소비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의해 초토화된 곳에서 타인의 아픔을 상상해 보기란 쉽지 않지만[4], CTS는 이를 극복해 버렸다. 말하자면, 이 가상의 군수 사업은 ‘아픔을 상상하는’ 힘을 시지각적으로 과시한다.
CTS가 제시하는 기술은 현실적이지 않음에도 호소력을 가질 때, 이는 현실에서 간접적 또는 직접 경험하는 재난이 이 정도로 쉽게 넘어갈 수 있다 =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기만으로 나타난다. 전쟁이나 대재난의 막대한 힘을 축소하기는 김선열이 전시 제목으로 가져온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의 소설의 무대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부는 가능하지만, 주식 투자처럼 통계 수치를 통해서(만) 재난 규모가 시각화되는 <SCC>처럼, 우리는 막대한 규모가 만든 대재난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앎은 간접적이고 일시적이며, 언제든 ‘채널 돌리듯이’[5]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전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가상이 아니며, 현실을 시지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적응하는— 즉 소비하는—측면에서 봤을 때 ‘현실의 팝업 스토어’라고 할 수 있다.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 ‘일시적’으로 기능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실질성에서 미끄러지면서, 시지각적인 간접 경험은 우리의 눈을 역설적으로 재난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장소를 가진 <SZS(Safe Zone Shelter) - 안전구역 셸터> 또한 시지각적으로 호소하는 특징이 있다. 재난용 쉘터라는 일시적인 쓰임을 생각한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빛을 난반사하는 은박담요는 전시공간에 견고한 장소를 만드는 대신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도 다른 작업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관람객의 신체적 경험이 동반되는 점이다. 생각보다 튼튼하고 따뜻하다는 사실은 관람객이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골자, 즉 프레임을 통해서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씌우는 대신, 이미지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시지각에 기반한 “기술-자본-재난 체계 안에 편입되어 있음을 몸으로 경험”[6]할 뿐만 아니라, 그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 전시에 포함된 작품의 제작년도는 모두 2025년이다.
[2] ‘좋아요’는 페이스북, ‘하트 보내기’는 인스타그램의 소통 수단의 하나다.
[3]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컨트롤의 편재에 따라 인간이 생활하는 환경, 즉 대지가 된다고 말한다. ポール・ヴィリリオ, 土屋進(譯), 『瞬間の君臨: 世界のスクリーン化と遠近法時空の解体』, 新評論, 2003, p. 201
[4] 귄터 안더스(Günter Anders)는 핵폭탄을 거론하면서 규모가 막대할수록 상상도 불가능하고 책임이 발생하기 힘든 점을 말한다. ギュンター・アンダース, 青木隆嘉(譯)『核の脅威: 原子力時代についての徹底的考察』, 法政大学出版局, 2016, p. 133-134
[5] 채널을 돌린다는 표현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2003)에서 가져왔다. 이 글이 쓰인 시기에 ‘채널’은 주로 TV 방송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겠지만, 오늘날 인터넷 사이트나 SNS 어플리케이션처럼 정보에 대한 관심을 여기저기 돌리며 켰다 껐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6] 김선열이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를 준비하면서 쓴 작가 노트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참을 수 없는 우레탄의 가벼움 (2023)
조숙현 (전시기획자/미술평론가)
김선열 작가의 작업을 분석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흥미로움은 어떤 ‘틈’, 혹은 ‘갭’이다. 그 틈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다. 시각예술 작가가 보여주는 ‘비시각’적인 틈이 비평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기대를 하게 했다. 여기서는 이 지점에 대해 최대한 집중하며 비평을 쓰고자 한다.
근작이며 대표작인 <쓰나미를 이기는 방법>(2023)은 재난 시대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재난 시대를 마주하는 작가의 이중적인 반응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장은 두 개로 구성되는데, 공간으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재난에 대한 인식과 경각-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태도를 꼬집는 개념적인 방식으로 나뉜다고 보아야 한다. 첫 번째 방에서는 방파제를 구성하는 테트라포드와 사이렌이 설치되어 있다. 사이렌에서는 실제로 경고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이렇게 두 가지의 전형적인 재난의 장치들이 전시되며, 작가는 우리의 현실-“우리는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라는 전언을 선언한다. 테트라포드는 우레탄폼을 사용하여 작가가 만든 작품인데, 실재보다 현저히 가벼운 질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재난이라는 상황과 대비되는 이런 ‘가벼움’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설치 작품 <Safe zone>에서는 작가의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공간에서는 ‘에어 튜브’가 중요한 기표로 작용한다. 에어 튜브는 비닐에 공기를 채워 만든 일종의 투명 창인데, 관객은 에어 튜브로 장착된 밀폐된 작은 공간 안에서 외부의 재난을 관람할 수 있다. 에어 튜브는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하나의 막에 불과하다. 즉, 보호막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재난이 닥친다면 보호의 기능을 할 수 없고,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너무나 허약하고 우스울 정도로 허술한 ‘뽁뽁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관람객은 에어 튜브 안에서 재난을 감상한다. 마치 자신은 그런 재난에서 영원히 보호될 것처럼 말이다. 김선열 작가는 바로 이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재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순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준다.
언젠가 외국 친구가 한국을 방문해서 나에게 서울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나는 내심, 이방인인 그에게 비추어졌을 나의 고향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는 무엇을 가장 인상적으로 포착하였을까? 서울의 오래된 역사와 고궁? 모던한 빌딩 숲?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사진이 비집고 들어온 틈은, 놀랍게도 ‘깜찍함’이었다. 서울의 유명한 랜드마크에 설치된 조형물은 고건축이나 유명한 작가의 조형 작업이 아니라, 펭수나 뽀로로, 루피,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들의 조형물이었다. 그것은 서울역에, 강남역에, 가로수길에, 홍대에 위치해 있었고, 한결 같이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표정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귀여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을 글로벌 도시로 키우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않고, 그에 따른 거창하고 세부적인 전략과 프로파간다를 내세우지만 정작 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뽀로로와 펭수인 것이다.
김선열 작가의 작품 <안전 장비> 중 ‘우주소년 헬멧’을 보고 문득 그 일화가 떠오른 이유는, 자본주의의 끄트머리에서 ‘소비 만능주의’로 향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도 정의될 수 있는 ‘소비 만능주의’에서 우리는 종종 난감하고 기이한 상품을 맞닥뜨린다. 그것이 기이한 이유는 물건의 기능과 목적, 그리고 생김새의 불일치에서 기인하는데, 물론 그 연유는 모든 것이 소비를 부추기는 요소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가령 펭수와 뽀로로, 네이버 프렌즈의 귀여움은 미소 뒤에 많은 것을 잊게 한다. 아니 실상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지갑을 열게 만든다. 그러나 그 맹목적인 팬덤은 사실 광신에 가까워, 새삼 현대인의 얄팍한 소비 철학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귀여우면 상관 없어요, 그것이 무엇이든, 난 그냥 소유할래요.’ 라는 식의 소비 철학은 이 도시의 이방인이 나에게 보여준 수많은 사진 속에서 반증된다. 그제서야 그 귀여움은 예사롭지 않은 어떤 공허함으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김선열 작가의 우주소년 헬멧은 아톰과 미키마우스 등 누구보다 친숙한 캐릭터를 차용하여 만든 보호 장치이다. 그러나 안전 장비라는 미명 아래 반짝이는 그것들은 소비욕구를 자극할 만큼 예쁘지만 동시에 보호는커녕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마 진정한 재난 상황에서 그 헬멧을 쓰고 나간다면 좀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덕 조던 하이’라는 작품은 “이 신발을 신으면 물위에서 엄청난 속력을 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땅위에서는 엄청난 점프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라는 천연덕스러운 문구로 우리를 꼬신다. 그러나 나이키 조던 시리즈 운동화에 도날드 덕의 물갈퀴 형상을 한 이 기이한 작업(제품)은 실상, 쓸모 없는 소비 지향주의의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외에도, 김선열 작가가 포착한 ‘틈’은 현대 사회 구석구석에 미친다. 이를테면 <너와 나의 사이> 같은 작업을 보자. 알록달록한 바위들이 놓여져 있다. (이 역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레탄 재질이다.) 그리고 그것을 투영하는 미디어 속 바위가 있다. 실재와 허구 중, 사람들은 무엇을 더 선호할까? 만약 이것이 아트라면, 놀랍게도 허구에 좀 더 가치가 실리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이 작품은 실상 불과 몇 년전까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NFT 열풍과 아트에 대해 다루면서, 그것을 실제 아트의 몸뚱이와 디지털 내부의 이미지로 분리시켜 NFT 아트에 대해 모두가 궁금해하지만 침묵하는,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아트가 될 수 있는가?’, ‘왜 그것은 실제 아트를 능가하는가?(특히 가격적인 측면에서)’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컬러풀한 바위는 이토록 가벼운가? 그리고 어떻게 이미지가 실재를 능가하는가? 이 너와 나의 ‘사이’는 젊은 작가가 미술계에 던지는 일종의 ‘허 찌르기’ 이다.
<나는 아니어야 한다> 작업 역시 현대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인 환경에 대해 다루면서, 그것을 다루는 현대인들의 아이러니한 태도에 대해 지적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모두가 환경 파괴의 심각성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는 아니어도 되기 때문이다’. 책임과 역할에 대한 불특정 타인에 대한 떠맡김은 환경 파괴를 멈출 수 없게 하는데, 그럼에도 환경 파괴 이슈는 끊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비 지향주의적이고 이슈 메이킹이 필요한 이벤트에 여전히 소비 파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흔한 에코백과 텀블러는 역으로 지구를 파괴하고 있고, 환경을 보호하자는 슬로건 홍보를 위해 종이와 플라스틱이 낭비되고 있으며, 환경 친화적인 태도는 그 어떤 것보다 소비 지향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다. <나는 아니어야 한다> 설치 작품에 등장하는 플라스틱 병과 도축된 돼지, 그리고 해양 쓰레기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설치물은 모두 이런 모순을 김선열 작가만의 화법으로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김선열 작가의 화법’ 내지는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의 그 질감이다. 작가들에게 있어 특기라는 것은 크게 ‘개념’과 ‘스킬’로 나뉜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롭고 개성 있는 작가만의 관점이 돋보일 때 그것은 개념과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고, 직접 눈으로 봤을 때 드러나는 디테일의 섬세함이나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자아내는 어떤 숭고함은 ‘스킬’로 거칠게나마 분류될 수 있다. 김선열 작가의 경우 스킬 중에서도 독보적인 ‘질감’에 대해 꼭 이야기하고 싶다. 우레탄이나 클레이, 레진 등의 질료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질감 – 질척이면서 귀여운, 불편함을 자극하는 어떤 덩어리성 –은 작가가 가진 뛰어난 역량이다. <안전 장비>의 불편함은 자본주의 속성을 꼬집는 작가의 태도보다는 그것이 실제로 사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완성도에서 비롯된다. <나는 아니어야 한다>에서 나뒹굴고 있는 빈 병들은 웨하스 과자를 연상시키는 질감 때문에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Brave New World>에 등장하는 클레이 등장 인물의 덩어리성 질감은 너무나 그럴듯해서, 그것이 지적하고자 하는 소비주의의 섬뜩한 공허함에 잘 어우러진다. 김선열 작가의 독특한 질감이 좀 더 날카로운 개념 지향성을 가질 때의 결과물이 기대가 되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Spot the difference> 전시서문 (2024)
작가, 그 오명 벗기기: 과도한 단독자에서 움직이는 연합체로
장기영 (문화비평)
‘작가(作家)’는 무엇으로써 작가일 수 있는가?
비인간존재에게도 ‘지능’의 개념이 허락되고, 복수의 인간동물들을 ‘인류’라는 단일한 집단정체성으로 존재 가능해 보이도록 해주었던 여러 조건들이 침범받는다. 인간보다 더 잘 배우고, 그 배운 것을 더 잘 활용하는 비인간의 존재는 마치 인류를 위협하는 듯 상상되어진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인 생성이 이미 예전부터 비인간의 것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그들의 생성 즉 ‘기계적’ 생성의 반대항으로 ‘창의적’ 생성의 범주를 고안하여 대문자 I(단수형 일인칭으로서의 ‘나’)가 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이 창의적 생성의 조건 또한 그들의 것이 인간의 것을 초과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김선열은 ‘작(作)’의 개념을 의심한다. 생성형 AI의 강렬한 등장과 그에 따른 존재감은 이미 도래해 있던 비인간 기반의 생성들을 없던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적인 존재일 수 없고, 작가의 창작 또한 즉자적일 수만도 없다. 창작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그리고 사물의 도움으로써 이룩되어 왔고, 무엇보다 창작 행위는 모방 혹은 그의 변주였다. 작가의 창작 행위는 마치 ‘전에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드는’ 것처럼 감각되곤 하지만, 기실 창작은 핍진성의 맥락 안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표상의 운동성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미끄러지는 모방들로 이뤄졌다. ‘창작’이라는 낱말에 새겨져 왔던 ‘단독자로서의 작가’를 의심하기 위함이다. 기존의 이미지들로 배합된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의 배합을 입체적으로 프린트한 후 작가는 다시 그를 본뜬다. 작가는 독자적으로 존재치 않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영역을 ‘인간의 온전하고도 유일한’ 것으로 범주화할 때, 창작자는 과도한 단독자로(조물주처럼) 자리매김된다.
비인간-인간 간 협업, 그리고 모방의 연쇄 속에서 탄생하는 창작 수행의 실재를 재현하기 위하여, 김선열은 3D 프린터와 생성형 AI 소프트웨어의 사용을 전면화한다. 예컨대 미드저니(Midjourney)로써 기존의 이미지들을 조합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고(<The originals(image)>), 이 이미지를 입력하여 3D 프린터로 모형화한다(<The originals(reproduction)>). 심지어 미드저니에 입력된 프롬프트(지시문)조차 챗지피티(Chat GPT 4o)로 생성한 문장이다(<The originals(prompt)>). ‘작가의 상상은 예술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은유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만듦에 대한 심상만으로도 물성을 갖춘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조차 사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김선열은 그간 정합성을 날조하던 현실을 조소(嘲笑)해왔다. 모순이 필연인 현실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번 전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과 창작, 그리고 기술에 ‘각각’ 매겨진 정합성들을 조소한다. 그러나 그 조소는 단출한 웃음(笑)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입가에 서린 주름을 미간으로 가져간다. 다시 골몰하는 것이다. 조소하기는 너무 쉬웠다. 그는 그 조소를 자신의 조소(彫塑)로 가져가 작가적 수행이란 무엇일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행할 수 있는 것인지로 나아간다.
<The originals(reproduction)>은 3D 프린터의 조소와 김선열의 조소를 나란히 배치하였다. 사물과 기술을 경유하여 ‘만들어진(피동형)’ 것의 바로 뒤에는, 이 피동적으로 생성된 모형을 다시금 작가 본인이 ‘손수 만든(능동형)’ 조형물이 함께 배치된다. 작가의 손길이 직접 가닿은 조형물이 도리어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작가의 수행이 무엇인지를 재귀적으로 지시한다. 우리가 그간 만나온 매끄러운 작품들은 작가(인간)와 사물(비인간)이 ‘함께’ 만들어왔다는, 자명하면서도 간과되는 사실. <Big picture>는 그 사실로 재귀하기 위한 자기지시이다. 생성 자체를 지시하기 위한 명령어 ‘/imagine’, 그리고 생성되기 원하는 이미지를 지시하기 위해 새겨져야 할 공란 곧 ‘prompt’라는 텍스트가 그 골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능동과 피동의 혼합물인 창작의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자기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첫 질문의 방향성은 수정이 필연시된다. 작가에 대한 정의와 규정을 찾아가려는 시도로 생성해내는 무수한 조건들은, 이미 실재로서의 창작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건으로써 작가라는 인간중심의 단일한 존재자를 규정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도래해 있는 인간-비인간의 연합이 실재적 행위로서의 창작을 얼마큼 움직여왔는지, 그리고 이 현상과 행위가 앞으로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조금 더 우리에게 필요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수정된다. 예술은 어떻게 움직여왔고, 움직이고 있는가?
각주1)
여기서 말하는 '연합'과 '움직임', 그리고 '관찰'에 대한 힌트는 행위자네트워크이론(ANT)에서 얻었다. 특히 ANT는 "비인간(nonhuman) 존재자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사물과 기술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인간은 비인간을 통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직면하고, 이렇게 생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종류의 비인간을 동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이미 비인간과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비인간의 복합체(collective)에 다름 아닌 것이다." 홍성욱, 「7가지 테제로 이해하는 ANT」,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엮음, 이음, 2010, 21쪽.
<쓰나미를 이기는 방법> 전시서문 (2023)
이가린
어젯밤에 재난 방송을 보며 잠들었는데 또 다른 재난을 알리는 문자가 오늘의 아침을 깨운다. 상시화된 경보는 이제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일러주는 듯하다. 매일같이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가는 재난의 소식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위기감과 공포감마저 자아낸다. 특히 전염병과 전쟁, 기후위기로 인한 전세계적인 혼란과 갈등 속에 보낸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재난에 대한 공포 심리와 이기주의가 경제적 이윤에, 정치적 책략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체득할 수 있었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저서 『쇼크 독트린: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2007)를 통해 전쟁과 테러, 경제공황, 자연재해 등의 재난이 불러온 쇼크 상황에서 대중의 불안 심리를 이용한 신자유주의적 정책(doctrine)이 자본과 권력을 특정 계층에 집중시켰음을 지적한 바 있다. 자본이 재난을 낳고, 또 재난으로 자본이 축적되는 이른바 ‘재난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다. 재난의 위기조차 이윤을 위해 이용하는 인류는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인류의 시간이 다 지나고 나면 지금의 현실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자본주의로 말미암은 여러 사회ㆍ문화적인 문제를 탐구해 온 작가 김선열은 전시 《쓰나미를 이기는 방법》에서 위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재난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형상화한 조각 및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먼저 작가는 몇 개의 시지각적인 기호를 활용하여 우리를 쓰나미가 발생한 재난 현장으로 소환한다. 전시장의 정적을 깨트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위협적인 파고의 쓰나미 영상이 눈 앞을 덮쳐오고 있다. 그 앞에 우레탄폼으로 만들어진 가벼운 테트라포드 조각들이 해일을 막기 위해 쌓여 있는데, 이는 대규모 재난 앞에서 인간의 취약성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뒤편에 놓인 ‘에어튜브’는 재난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비유한 장치일까. 비닐에 공기를 채워 만든 큐브 형태의 에어튜브는 작은 충격에도 손상될 위험을 담보한 얄팍한 안전망임에도 불구하고, 전망대나 잠수함처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투명한 창을 갖추었으며 내부에는 비치체어가 놓인 아이러니한 공간을 보여준다. 재난이 닥쳐오는 풍경을 그저 한가로이 조망하게 하는 이 장치는 재난이라는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있는 것이자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무모한 태도를 시각화한다.
나아가 작가는 재난 상황에 사용될 안전 장비의 시제품을 선보이는 박람회 형태의 공간 설치를 통해 재난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 만들어낼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한다. 이미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벽체가 부서지고 뼈대가 드러난 진열대가 보여주듯, 이 공간에서는 폐허의 이미지조차 재난용 안전 장비의 현장성을 강화하는 하나의 컨셉으로 이용된다. 폐허 컨셉으로 꾸며진 상품 진열대 위에는 재난 현장의 물리적인 위협으로부터 인간의 신체를 보호해 줄 구명조끼와 안전모, 안전화, 장갑 시제품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각 용품으로부터 안전성이나 실용성을 발견하게 되기보다는, 대중적인 만화 캐릭터의 외형적 특징을 차용한 그 디자인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벗어 놓은 것처럼 귀여운 형상을 하고 있는 안전 장비들은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기존의 시장에는 없던 독특한 외형으로 소비심리를 자극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재난 상황에 필요한 안전 장비조차 차별화를 위한 패션 아이템으로 전락시켜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자본주의의 단편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전염병과 함께 캐릭터 마스크, 퍼스널컬러 마스크, 명품 브랜드 마스크 소비가 유행했던 양상을 떠올려보면, 이 또한 우리 현실과 크게 유리된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여러 상징을 담은 조각과 설치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은유하는 방식은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프로젝트 <Animal Farm>(2020)과 <Brave New World>(2021)에서 선보인 동물의 탈을 쓴 인체 조각이나 만화 캐릭터들이 놓인 디오라마(diorama)를 통해 작가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차별, 문화침투 현상, 권력구조의 병폐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이때 디오라마의 축소된 무대 위에 놓여 있던 미니어처와 같은 상징적인 사물들은 전시 《Trouble in Paradise》(2022)에서 실제 사람의 크기만큼 확대된 모습으로 나타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아이러니한 현실을 강조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전시 《쓰나미를 이기는 방법》에서 작가는 마치 관람객이 디오라마 속으로 들어온 듯한 조각과 공간 설치를 선보임으로써 재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위기에 대한 보다 실제적인 감각을 일깨운다. 일련의 작품을 통해 대중문화의 요소를 활용하는 특유의 유머와 위트를 유지하면서도, 규모와 시점을 달리하며 주제에 걸맞는 공간을 구현하는 작가만의 조형언어가 드러난다.
역설과도 같지만 재난을 이겨낼 방법이란 결국 재난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전환하고,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를 변화시켜야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는 자신만의 유희적인 어법을 활용해 우리가 직시하지 못하는, 때로 외면하는 재난 자본주의의 현실을 포착함으로써 그 전환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이렌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가운데 재난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하게 된 우리는, 이제 뒤돌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놓여 있다.
<Trouble in Paradise> 전시서문 (2022)
장기영 (문화비평)
<Trouble in Paradise>는 ‘아이러니’에 대한 작가의 응시가 실천으로 옮겨진 전시이다. 작가는 문제적인 현실에 대해 직접 묻거나 따지는 대신, 이 모순의 수사법에 기댄다.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부조화의 현상들을, 부조화의 수사를 차용하여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무언가를 ‘지적함’으로써 절대 주어가 되기보다는, 겹겹의 아이러니를 ‘보여줌’으로써 주어의 자리를 비워둔다. 우리는 이 주어에 ‘우리’를 새겨 넣을 수 있을까.
작가는 500원을 응시했다. 누군가에겐 애호하던 점심 메뉴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값이자, 한편의 누군가에겐 버려져도 무방한 값이 된 동전 한 닢. 서울 노량진의 컵밥 가격이 500원 인상되어 애호하던 점심 메뉴를 포기한다던 이들의 소식, 그리고 암호화폐와 주식에 이어 아트테크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소식. 김선열은 이 양극단의 소식들로써 ‘화폐의 값어치’라는 아이러니를 직시했다. 모든 것을 ‘값’으로 환원할 수 있게 하던 기준, 곧 값어치의 기준이었던 화폐‘에조차’ 값이 매겨질 수 있다는 현재의 아이러니를 발견한 것이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구성하고 있는 세 작품 모두에서 NFT(Non-Fungible Token) 혹은 그것의 그림자를 마주할 수 있다. 먹기 위한 먹임(가축)과 삶을 위한 죽임(축산)을 관통하는 비인간동물들, 그리고 추억-취향-일상 등 우리의 기호(嗜好)들을 텅 빈 기호(記號)로 만드는 숱한 ‘-테크(tech)’들. 이들은 모두 NFT와 맞닿고 있다. NFT는 자본의 흐름을 집약하는 ‘생산’과 ‘투자’ 행위를 또 다른 차원에서 재현한 가상화폐이기 때문이다.
NFT는 대체할 수 없는, 그 자체로써 원본이 되는 화폐를 표방한다. 그러나 NFT 거래의 실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던 ‘화폐’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듯하다. 원본이 되려는 가상, 그 가상에 의하여 대체 가능한 사본으로 전락하는 듯한 실재.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 또한 ‘실재하는’ 것이 맞을까. 화폐는 가상화폐의 원본이 맞을까. 이 시뮬라크르(simulacre)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가는 그 무엇도 정의 내리거나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노멀(normal)’에 ‘뉴(new)’가 붙은 지금 이 시대를 새로운 일상의 시작으로 말끔히 정의 내리지도 않고, 20세기의 이데올로기들을 종결된 무엇으로 간편히 치부해두지도 않는다. 변화됨을 주장하는 것들에조차 드는 기시감, 다음의 세계로 넘어갔음에도 종결되지 않은 이전 세계. 이는 작가가 이전 작업에서부터 그 의미의 시효가 다한 듯한 이데올로기들(제국/식민주의, 자본주의 등)을 재현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변하지 않은’ 변화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무엇에서부터 무엇으로의 ‘변했음’을 뜻할까.
그리하여 우리가 이 전시에서 바라보는 이미지들은 익숙한 사물들의 조합이 된다. 새로움을 담지하지 않는 변화들에 대한 패러디이다. 기시감 드는 이미지들이 조합되었을 때, 우리는 이 이미지들 간 ‘사이’를 응시하게 된다. 이 순간은 곧 이 전시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패러디로서의 재현, 그러나 실재에서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재현. 우리는 원본과 사본의 관계를 의심하게 하는 이 이미지들로부터 무슨 말을 건네받고 있을까. 이 전시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각각 어떠한 문장의 주어가 되었을까. 당신의 문장이 궁금하다.